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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위로에서 끝나버린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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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소설 첫머리부터 마지막 장까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한국 사회의 제도적 불합리성과 마음의 상처들을 다소 과격한 설정으로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쉼 없이 달린다. 첫 손님으로 여자를 태우지 않는다는 택시기사 이야기, 우연히 발견한 사내 여직원들의 화장실 몰카를 은밀하게 돌려보는 남직원들, 공원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있는 여성을 맘충으로 치환하는 회사원들, 남자 형제들을 위해 뒷바라지하며 자신들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이야기 등처럼 여자라는 이유로 겪었던 차별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설 전반에 걸쳐 유의미한 것은 억압받는 여성인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다. 여성 독자라면 공감대 형성을, 남성 독자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

 

생존을 위한 남녀의 역할 분담


남아선호 사상의 역사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부여받는 기회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분법적 사고가 퇴화되고 포스트모더니즘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은밀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남성은 여성을 지배한다. 일부 억울한 남성들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또는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가능성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아직은 성숙하지 못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생물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구분된다. 여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을 한다. 모유수유 역시 여성만이 가능한 특별한 능력이다. 남성은 어떠한 노력과 방법으로도 출산이나 모유수유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높다. 그렇지만 힘의 균형에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남성의 신체적 특성이 우수하다. 이러한 생물학적 특성을 기반으로 고대시대부터 남성은 수렵채집활동처럼 외부의 활동을 도맡았고 여성은 가족을 돌보는 내부의 일을 담당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할분담이 야생적 환경에 노출된 상태에서 생존에 훨씬 `효율`적이고 `적합`하기 때문이다. 


근대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던 철학자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설파했다. 이는 힘의 정치적 우선권이 노동과 육체에서 지식과 정보와 같은 정신적 활동으로 이동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도적, 정치적 기반은 여전히 생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남성적인 모습으로 곳곳에 남아있다. <82년생 김지영>는 시대가 변했음에도 아직도 변하지 못한 제도적 모순들에 대한 반격이다. 노동은 기계가 대신하며 정신적 활동으로 힘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 강함보다 정신적 강함이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효율`적이고 `적합`해졌다. 정신적 활동은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듯 시대가 변했고, 힘의 원천이 육체에서 정신으로 탈바꿈되었다.

여성평등에 대한 가치는 성별을 뛰어넘어 우리가 맞이하는 시대에 어떠한 것이 생존에 더 적합한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를 이해하고 내적 공력을 높일 때 작금의 상황이 직면한 표면적 문제들을 통찰할 수 있다. 반대로 한남충이나 꼴페미란 단어는 시대를 역행한다. 근래 유행하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적폐` 이다. 

 

위로에서 끝나버린 아쉬운 소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현상황을 비판하고 위로받기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 이상 보여줄 게 없는 다소 아쉬운 소설이다. 소설 중간마다 여성이 처한 현실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객관적 수치를 인용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재에만 머물러 있다. 보다 균형 잡힌 시선으로 역사를 들추어내고 자아성찰의 면모를 갖추었더라면 잠자고 있던 한남충과 꼴페미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진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주인공 김지영이 나 혹은 내 옆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태도의 신중함을 요구한다. 더욱이 남성 독자라면 스스로를 점검해보는 체크리스트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한 번쯤 읽어보면 괜찮지 않을까? 정도의 소설로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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