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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밀스의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판단하지 않는 비판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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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를 이해하는데 꽤 잘 쓰인 책

서구 근대성을 날카롭게 비판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극단적 회의와 생산적 모순으로 서양 철학사 중 단연 권위 있는 철학자로 평가된다. 20세기 프랑스에서 실존주의 철학을 설파했던 사르트르와 함께 푸코의 철학은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상당했다. 미셀 푸코와 사르트르 덕분에 20세기 서양 철학은 프랑스를 중심에 둔다. 더욱이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또 다른 점은 작금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들의 철학은 현재 우리가 말하고 이야기하고 느끼는 삶의 방식을 해석하고 채워준다. 현재 우리 삶 내부에 사르트르와 푸코의 철학이 작동하고 있으며, 이들이 제시한 사유의 틀 속에 우리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겠다.

사라 밀스의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는 미셸 푸코의 개론서로써 푸코적 사유 방법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푸코의 유명한 저서 <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뿐 아니라, 논문 및 인터뷰 내용도 함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푸코를 접하는 데 이만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사실 푸코 스스로 자신의 글이 난해하다고 고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기 때문에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푸코의 철학이 흥미로운 이유​

철학자 푸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일상성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토대로 그것이 어떻게 권력을 부여받고 담론을 형성하며 구분과 배제를 낳는지 이야기한다. 특히, 비역사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구조주의자이자 비구조주이자이며, 비인문학자이자 인문학자란 이야기는 푸코의 사상적 체계가 일관적이지 않고 모순적인 측면이 있음을 말해준다. 때문에 일관되지 않는 그의 주장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푸코는 이렇게 답변한다. “글쎄요! 그럼 당신은 제가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연구해서 변함없이 똑같은 주장만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덕분에 구조주의자임과 동시에 해체주의자로 일컬어지며 현대 철학이 나아가야 할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불교의 만다라처럼 건축과 해체가 자유로운 푸코의 사상은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반대로 기존 사상이 가지고 있는 일상성과 당연함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지식과 권력을 획득하는지 일깨워준다. 자신의 생각조차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푸코의 철학은 극단적 해체주의자로써 기존의 모든 상식의 전복을 시도한다.

미쉘푸코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판단하는 행위를 꿈꾸다

흥미롭게도 푸코는 판단하지 않는 비판에 관하여 꿈꾼다. 우리는 어떠한 담론이나 생각에 대해 비판을 가할 때 그것의 문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개선된 판단을 내리거나 혹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푸코는 어떠한 것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그것과 반대되는 개선점을 도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어떠한 이론에 대해 부정성을 밝혀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선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악을 밝혀내는 행위의 반대급부인 선의 증가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지 않는 것이다. 판단의 유보. 이것이 푸코의 지향점이자, 진리를 탐색하는 방법인 것이다.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를 통해 푸코는 질문한다. 우리가 현재 옳다고 여기는 상식적인 가치들이 발전과 진보의 자명한 결과물인가? 하고 말이다. 현재의 역사는 언제나 발전과 진보를 전제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역사는 연속적이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단절된 부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역사 속 단절된 부분, 즉 역사 속에 존재했던 변두리와 주변을 탐색함으로써 단절된 낯섦을 찾아내고 그 낯섦음을 통해 현재의 낯섦음을 밝혀낸다. 즉, 담론의 반대편에 위치한 배제된 것들을 조망하면서,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모든 가치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아무리 선한 기준일지라도 그러한 기준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어떠한 기준점이 생기면 그것은 반드시 상식적인 것과 비상식적인 것으로 양분하게 된다. 비록 그 기준점이 선함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제의 본질은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선과 악으로 구분 짓는 행위의 원천과 이로 인해 탄생하는 배제의 원칙인 것이다. 기준은 구분을 짓고, 이는 다시 배제를 낳는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이차적 판단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내리지 않은 판단에 대해 자유로워져야 한다. 권위자로부터 파생된 판단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스스로 내린 판단이라고 착각하고 이를 긍정하게 된다. 공감하는 대목이다. 내가 미디어와 언론에 대한 자유를 꿈꾸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지식은 권력관계와 정보에 대한 욕망이 결합되는 지점’으로 지식과 권력에 대해 의심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해방이 필요하다.

 


지식의 생산 과정은 언제나 배제의 과정을 동반한다. 즉, 하나의 지식은 그와 비슷한 타당성을 지닌 다른 여러 지식 체계를 배제함으로써 지식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지식을 의심해야만 한다. 지식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줄 수도 있다고 확신하는 그 순간, 그 지식은 역으로 현재의 사회 체계와 권력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age.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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