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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야 간지의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철학적으로 진단하는 일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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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서점에서 마주친 도발적인 제목의 책 이즈미야 간지의<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는 제목만 읽어도 통쾌하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 혹은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는 시간으로 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언뜻 보면 쉽지 않은 제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현대 사회에서 일이란, 자아 찾기나 실존에 대한 물음과 정반대 편에 위치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 따위를 보람으로 삼고 싶지 않은데, 회사는 계속해서 일에 의미를 끊임없이 부여하기 위해 채찍질한다. 더욱이 일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게끔 갖가지 교모한 장치로 직원들을 부추긴다. 회사가 교묘하게 내세우는 그릇된 논리는 대표적으로 주인의식 같은 단어의 남용이다. 가족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일처럼, 자신의 돈처럼 생각하라고 그럴듯한 가치를 내세우지만 정작 회사는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지 않는다. 진짜 가족의 경우 어떠한 사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 집에서 나가라고 통보하지 않는다.

먹고사는 것조차 어려웠던 과거 시절에는 생존을 위한 먹고사는 문제, 즉 저차원적 욕구를 해소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개인의 내면보다 물질적 표면의 풍요로움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중대한 문제였다. 저차원적 욕구의 문제야말로 삶의 전부였고 이것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일’이었다. 일은 곧 삶이었고, 삶은 곧 일이 었다. 더욱이 매일 새롭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사회 모습은 그 안에서 일에 대한 보람도 있었고, 영광과 자부심도 함께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버텨낼만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저차원적 욕구는 거의 대부분 해소되었다. 사람들은 굶어죽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다.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저차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만 집중하는 상태에서는 그것을 충족시키는 일을 마치 ‘살아가는 의미’인 양 착각하기 때문에 의미에 대한 의지가 발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충족될 가능성이 없는 막다른 상황에 몰렸을 때, 혹은 이미 충족되어서 굳이 그리로 의식을 돌릴 필요가 없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과 죽음, 즉 자신의 삶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차원적 욕구 해소가 삶의 중대한 요소였던 헝그리 모티베이션으로 살아온 기성세대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갖추고 태어난 젊은 세대와는 근본적으로 가치관에 차이가 있다. 중년과 청년의 온도 차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헝그리 모티베이션으로 살아온 중년들도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실존적인 물음 앞에 결코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주위에서 많은 경우를 본다. 은퇴를 앞두고, 망가진 몸을 병상에 눕힌 채, 자식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 중년 앞에 남겨진 것은 평화와 행복이 아닌 실존적인 물음이었음을...

저자는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며 그리스 시대에는 일보다 중요한 가치로 관조 생활이 있었음을 지목한다. 관조란 성찰 또는 명상과 가까운 의미로 자연과 진리를 차분한 자세로 탐구하는 자세를 뜻한다. 또한 아렌트는 그리스 시대 사람들은 노동을 경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류는 산업화를 거치고 효율성을 위해 분업화가 본격화되면서 관조 생활은 사라지고 어느새부턴가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예 이하의 존재로 추락했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고귀한 가치는 사라지고 자본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본말 전도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전 경멸의 대상이었던 노동이 왜 찬양받게 되었나? 그것은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모든 것을 양적 가치로 치환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가 갈고닦은 ‘노동가치설’은 노동만이 유일한 가치 있는 일이란 사상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나치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걸려있다. 새빨간 거짓말에 현혹되어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노동의 가치에 세뇌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통렬한 풍자로 다가온다. 아래는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에 나오는 질문과 대답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데, 재미있게 읽어볼만하다.

질문: 자네, 이름이 뭔가?

대답: 임금노동자입니다.(...)

질문: 자네의 종교는 뭔가?

대답: ‘자본교’입니다.

질문: ‘자본교’는 자네에게 어떤 의무를 부여했는가?

대답: 중요한 두 가지 의무, 즉 권리 포기의 의무와 노동의 의무입니다.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할 것, 태양 아래서도 가스등 아래서도 일할 것, 즉 우리의 종교는

언제 어디서나 일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질문: 자네의 신’자본’은 자네에게 어떤 보답을 내려주시는가?

대답: 언제나 아내와 어린 자녀 그리고 저에게 일을 주시죠.

질문: 그게 유일한 보답인가?

대답: 아니요. 저희는 경외해야 할 승려나 잘 사는 사람들이 항상 먹고 있는 고기와 고급 식량을 먹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입에 댈 일이 없겠지만 그들은 저희가 맛있어 보이는 진열품을 눈으로 맛봄으로써 허기를 채우도록 허용합니다.(...) 선택받은 높은 분들이 저희 것이 될 수 없는 훌륭한 음식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그 음식들이 저희의 손과 두 뇌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생각하면 저희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말라는 이 책의 결론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인간 변화의 성숙 3단계 낙타 -> 사자 -> 어린아이로 압축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면 낙타는 미숙한 0인칭 상태다. 나라는 존재가 희미한 상태로써 근본적으로 수동형 인간이다. 한 사람 몫을 하는 사회인으로서 열심히 일은 하지만 인간의 내적 성숙 관점에서 보면 순응하며 반응하는 삶이 전부인 겁 많은 인간 형태이다. 그리고 사자는 1인칭의 상태로, 자아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면서 수동적인 존재에 대한 회의로 사회와 기존의 불합리한 가치관들을 향해 울부짖는 상태다. 자신에 대한 실존적 물음과 함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아이는 초월적 0인칭의 상태로 자아에 대한 에고를 내려놓고 순수한 아이의 상태로 돌아가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은 채 모든 행위를 놀이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는 ‘그렇다’와 같은 성스러운 긍정이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모든 일(노동을 포함하여)을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창조적인 놀이 행위와 같은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림으로써 잃어버린 감각 기관(특히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아 능동적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니체를 통해 압축 요약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우리는 이미 사상과 예술을 장식에만 이용하지 않고 내 것으로 받아야 들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점에 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이 책을 써내려온 원동력이 되었다.”라고 고백한다.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책의 후반부에 로버트 헨리의 <예술의 정신>,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훌륭한 인용구와 주옥같은 저자의 문장들이 펼쳐진다.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은 오프라인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무심하게 집어 들었지만 내용은 깊고 이해하기는 쉬우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일과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린 모두에게 강력하게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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