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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배꼽 빠지게 웃긴 중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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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은 누군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작품이 되고, 백만 명 혹은 그 이상이 읽는다면 백만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이 된다.” - 위화 -

허삼관 매혈기는 진짜 재밌는 소설이다. 내가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 중에 과연 독보적이다. 단지 익숙하지 않았던 중국 문학 작품이란 프레임이 나를 조금 망설이게 만들었지만, 착오에 불과했다. 숨쉴틈 없는 전개와 경쾌한 리듬은 소설의 첫 장을 펼치고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독자들을 압도한다. 한 인간의 삶의 대서사시가 독자들의 마음을 이리저리 훼방 놓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허삼관의 삶 속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각자의 삶을 비추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가 위화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허삼관 매혈기>는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쌩뚱맞게 이 소설이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혹시 작가가 평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번역의 오류이거나. 위화는 덧붙여 말한다. “그가 추구하는 평등이란 그의 이웃들,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아주 재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 생활의 편리함이나 불편 따위에는 개의치 않지만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고 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작가의 의견에 수긍이 간다. 소설 장면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본다. 삶의 희로애락이 애초부터 가능한 이유는 지극히 평범함 속에서 숨 쉬는 평등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옥수수죽이 견딜만한 이유는 나라가 어지러워 모든 사람들이 옥수수죽을 먹기 때문이다. 첫째 일락이가 남의 자식이란 사실을 알고 분개한 허삼관은 인내력을 잃는다. 분명 자식이란 오로지 자신의 핏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상에서 가끔씩 돌출되는 비범함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평등이란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평등의 균열은 타인의 삶에 자신을 비추는 계기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 삶의 희로애락이 존재한다. 즉, 삶은 원래부터 불평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평등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불평등은 평등으로부터 출발한다. <허삼관 매혈기>는 어긋나는 듯하면서도 결코 크게 어긋나는 법 없이 균열 난 평등함 속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조화롭게 공명한다.

<허삼관 매혈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거침이 없다.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쏟아 낸다.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놓쳐버리기 일쑨데, 이 소설에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삶을 채우는 사람들. 그곳에는 억울한 감정이나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압축된 감정도 시원한 말 한마디와 함께 금방 휘발되어 날아간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면 답답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단어는 강렬한 통쾌함이다.​ 그리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반면에 서로 눈치보기 바쁜 현대 사회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조심성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게 되었는가? 날선 사회의 예리함을 피하느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망각의 삶을 산다.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회색 가득한 사회. 그 변두리에서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우리의 삶을 더듬어 본다.


수면에 있는 물은 더러워. 바닥 물도 더럽고.

그러니 중간쯤에 있는 물을 떠 마시라고.

-Page.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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