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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시인이 이렇게 인기가 있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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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듯이 인도와 티베트를 여행하는 류시화 시인은 대중과 가장 멀리 있으면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시인이다. 열정적인 에너지로 다수의 작품을 쉴 틈 없이 출간해낸다. 멈추는 듯하면 어느새 움직이고 있고, 움직이는 듯하면 어느새 그 자리에 돌처럼 멈춰있다. 류시화 시인의 삶에는 무한한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고 있음을 직접 그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철학자 니체가 이야기한 위버멘쉬는 바로 류시화 시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류시화 시인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그가 직접 겪은 경험들이 한데 어우러져 저 멀리 흐릿하게 걸려있던 삶의 통찰과 깨달음을 이곳으로 가져온다. 진리는 경험하는 것이라 했던가? 진리는 사고를 통해 얻을 수 있지만, 그 이상 정의하기란 어렵다. 이 단순한 사실에 온몸을 내던지는 이가 류시화 시인이다. 파드마 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의 번역가로 그를 처음 만났지만, 그가 출간한 책을 몇 권 거치면서 나는 어느새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이 책의 대표적인 간결한 문장들이지만 시(視)가 아닌 견(見)의 시선으로 의미를 곱씹어 보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섣부른 판단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류시화 시인의 이야기처럼 섣부른 판단으로 우리는 관계의 소중함을 망치고 누군가를 잃어 간다. 관계의 틀어짐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타인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편협의 늪은 깊어지고, 타인과의 관계는 틀어진다.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것이 쉼표이든 마침표이든 자신의 삶의 입법자는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길의 끝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과 만나게 되며,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심으로 타인과 교통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인도와 티베트를 오가며 글을 쓰고 명상을 하고, 마주하는 모든 것들과 벗이 되는 삶이란 어떤 느낌일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경제적 자유를 꿈꾸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라는 색안경으로 저자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시인, 학생, 누구누구의 부모, 선생님 등등 우리를 표현하는 모든 역할에서 한 발짝 물러서야 한다. 류시화 시인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무엇을 하는 존재일 필요는 없다. 주어진 역할에 따라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존재 그 자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을 깨닫고 존재의 역동성에 눈을 뜨는 것. 그러면 마침내 우리들이 찾고 있는 것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덧없고 영원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Page.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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