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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하는 삶(장자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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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하는 삶은 수동적이다.

관조는 마음의 텅 빈 상태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일을 말한다.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며, 사역적이지 않고 피동적이다.
우리의 인식 활동은 대개 능동적이거나 적극적이다. 자신에게 이미 있는 체계나 지식을 동원하여 세계에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대개 자신의 체계를 세계에 강요하는 일로 귀결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미 있는 체계 내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사실은 세계를 전면적으로 인식하거나 세계의 진실을 접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세계의 진실성을 접촉하는 일 혹은 세계의 '유동적 전체성'을 포착하는 일은 자기 안에 준비되어 있는 인식 체계를 포기하고, 세계가 전체적으로 자신에게 드러나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관조는 매우 비밀스럽고 찰나적인 일일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장자는 세계의 진실과 만나는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체계에 갇힌 자기를 '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곽자기가 책상에 기대앉아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멍한 모습이 실연이나 당한 것 같다. 안성자유라는 제자가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되었고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으십니다. 지금 책상에 기대고 계신 모습은 전에 책상에 기대고 계시던 모습과 다릅니다." 그러자 자기가 말했다. "이런 질문을 하다니! 너 참 대단하구나! 나는 지금 나를 장례 지냈다. 네가 그것을 알아봤단 말이냐?" - 장자, <제물론> -

'장례 당한'나는 구분되어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제한적 조건들을 벗어난 상태다. 이것을 장자를 비롯한 도가 전통에서는 '허'라고 표현한다, 이 '허'의 상태는 자신을 이 세계에 대하여 '수동적 상태'를 유지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세계를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밀한 활동을 시작한다. 내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관조적 사고 활동은 최고 단계의 인격적 특징이다.

장자가 보기에 최고 단계의 인격이 하는 사고 활동은 "사물의 사실적인 움직임을 그대로 따르지, 거기에 자신의 사적인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수동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관조적 사고 활동이다. 드러나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잘 정비된, 혹은 텅 비운 마음의 상태를 장자는 '심재'라고 칭한다.
자신을 감각의 제한 속에 두지 않는다. 마음속에 이미 구축된 기준을 적용하려 애쓰지 않는다. 어떤 가치나 체계가 개입되지 않은 '사실'의 세계에 자신마저도 그저 '사실의 덩어리'로만 남겨둔다. 거기서 자신은 세계의 진실과 비로소 만난다. '유동적 전체성'을 자신이 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 활동을 아리스토텔레스나 스콜라주의자들은 모두 '관조'라고 불렀고, 이 관조적 활동 혹은 '관조적 삶'이 인간 안에 '신적인 어떤 것'을 실현하는 일로 다루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 궁극적이며 최고의 차원에서 '인간'인 것이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보는 것

참 신기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수동적 사고 활동이 자기 소멸로 귀결되지 않고, 어떻게 자아실현의 활동으로 귀결될 수 있는가? 장자에 의하면 우리의 감각 기관이나 마음의 활동은 세계를 '소유'하려는 활동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장례 지낸, 즉 '자기 살해'를 지난 '텅 빈' 자아는 오직 관조적 태도를 유지하며 소유하려는 어떤 노력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그냥 받아들인다. 세계를 개념적으로 포착하지 않고, 세게 전체 즉 '유동적 전체성'에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것이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마음과 세계가 일체를 이룬다. 이제 마음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봐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의 세계는 자신의 마음보다 훨씬 넓다. 결국 관조적 상태에서 세계와 이룬 일체는 마음을 넓게 확장시켜 주는데, 이것은 바로 자기 존재의 확장이 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세계를 존재적 상태로 내버려 두었더니 세계가 마음에 소유되어 버렸다. 이것을 우리는 자아실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관조적 인간은 다시 주도적이고 능동적 인간으로 등장한다.

이 수동적인 사람이 결국은 외적 세계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주체성을 실현하게 된다. 세계의 전체성을 품은 사람이 그 전체성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하는 행위가 자신에 의해 능동적으로 실현되고 결국 자아가 이 세계 속에서 실현되는 결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결국, 관조적 활동이 수동적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계의 진실이나 전체성을 제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가장 궁극적인 의미에서 인간일 수 있다.

-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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