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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욕망의 경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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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으로 변질된 사랑의 위선

사랑은 인간의 자발성을 이끌어내고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열쇠를 지고 있다. 하지만 '사랑'만큼 잘못 인식되는 것 또한 없다.
사랑은 자주 욕망과 혼동되거나 욕망을 위장하는 대의명분으로써 이용된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로 부모의 허영심이나 타산을 위장하고 자녀를 강압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세상을 위해, 인류를 위해'라는 동기로 이루어지는 자원봉사 활동이나 종교적 활동, 또는 의료와 복지, 교육 등에도 이러한 위험이 잠재해 있다.
즉, 인류에 도움을 주는 이 활동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거나 사는 보람을 느끼고 싶다는 동기에서 행해진다면 이 역시 욕망이 위장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행'처럼 보이는 행동이 자기 인생의 보람이나 존재의 증명을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 것이라면 그 행동이 아무리 사랑인 듯 보일지라도 내면의 진실은 욕망이므로 위선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랑이라는 개념에 관해 '욕망'과 명확히 구별하기 위한 정의 부여를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사랑은 상대가 상대답게 행복해지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욕망은 상대가 내가 생각한 대로 되기를 강요하는 마음이다.

이즈미야 간지 <'평범한 것이 좋아'라는 병>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독립성과 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의 독립성과 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하지만 욕망은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지배와 정복을 행하려고 하며, 조정을 지향하는 특성을 지닌 머리에서 생겨난다. 
머리와 마음을 둘 다 가진 우리 인간은 결코 순수하게 사랑만 좆는 존재가 되기는 어려우며 자신도 모르게 욕망에 휘둘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욕망의 덩어리'라고 요기는 일부 사상가의 견해에는 찬성할 수 없다.
사람들의 욕망이 여러 집단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연구하는 마케팅 이론에서는 그러한 견해가 반드시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현상을 생각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는 수준 낮은 일면만으로 인간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냉정한 비관주의이나 잘못된 허무주의에밖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랑의 잠재력을 내포한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치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닐까.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와 거부 반응도 인간을 욕망만 가진 존재로 잘못 인식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공연히 개인주의를 밀어붙이다가는 이 사회가 인간의 '욕망', 즉 이기주의가 판치는 무질서한 상태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직도 많은 사람의 밑바탕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욕망에서 사랑으로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랑을 향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머리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욕망을 직시하고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으로는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이 작은 욕망을 멀리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같이 서툰 인간이 거짓 없는 사랑으로 가는 방법이다.

도덕(보편)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에게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 오스카 와일드 -

도덕(보편) 따위를 생각해내는 것은 뇌가 쇠약해진 탓이다.
- 아르튀르 랭보 -

 

- 이즈미야 간지의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중 -

 

 

2019/09/11 - [북리뷰.서평.] - 이즈미야 간지의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철학적으로 진단하는 일의 본질"

 

이즈미야 간지의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철학적으로 진단하는 일의 본질"

오프라인 서점에서 마주친 도발적인 제목의 책 이즈미야 간지의<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는 제목만 읽어도 통쾌하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 혹은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는 시간으로 채우며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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