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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자아 찾기 과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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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머리의 착오로 인해 수단을 자기목적화하거나 결과만을 단편적으로 추구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자칫 대상 자체의 본질에서 벗어나 수단이나 부산물을 목적이라고 잘못 파악하기가 쉽다.

고학력을 달성하고 일류 기업에 취직해 높은 사회적 지위와 수입을 얻는 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 다양한 것을 배우게 하는 일 등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좇는 가치는 원래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그들 수단 자체가 목적으로 변질된 것이다.

한편 우리의 본능적인 부분인 '마음=몸'은 질을 직접 감지하고 맛볼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마음=몸'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중심이며, 마음과 신체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는 것은 결코 가치 있는 일을 이뤄서가 아니라 '마음=몸'이 다양한 일을 맛보고 행복을 느낌으로써 실현된다.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혹은 빠져나오는 일이다. 진정한 자시은 어딘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마음=몸'을 중심으로 한 생명체로써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옴으로써 달성된다.

일을 통해 자아를 찾는다는 허상

루터는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일에 종사하는 것은 모두 소명이다'라고까지 확대해석하고 이것을 '천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미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실현이라는 명목으로 '본연의 나'에 어울리는 직업을 찾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철학자 스벤젠은 이러한 현대인의 상황을 비꼬아 '낭만주의적 변형'이라고 지적한다.
현대의 진정한 자신 찾기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 찾기로 바뀌었다는 그의 지적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 주어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자아의 형성만을 목표로 한다. 진정한 자아는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노동은 스스로 자아를 창출하는 과정에서의 도구다"라고 말했듯이 진정한 자아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 의해 창출되는 '새로운 자신'으로 완전히 개념이 바뀌었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일 찾기를 통해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진정한 자아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바깥쪽에 갖춰져 있고, 그래서 이미 사회에 마련된 '직업'과 연결함으로써 자아가 실현된다는 사고방식은 확실히 사람들을 끝없는 '자아 찾기' 즉, '일 찾기'의 미로로 몰아넣고 있다. 그는 이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진정한 자신을 밖에서 찾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직업이라는 좁은 범주에 맞춰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사람이 진정한 자신으로 살고 싶다고 진지하게 갈망하는 바람 자체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준비되어 있는 일의 대다수가 '노동'이라고 불리며 보람이 적고 단편화되어 있는 오늘날, 기존의 선택지 안에서 끝없이 '직업 찾기'에 매달려 헤매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때로는 자신의 내면에서 '마음=몸'이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직업이나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창출하는 것도 좋고, 어딘가에 이상적인 직업이 준비되어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신의 자질에 맞고 더 어울리는 직업으로 진로를 변경해보는 것도 좋다. 일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가령 노동에 종사해야만 하는 경우에도 어떻게 하면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야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궁리하면 된다. 언뜻 무미건조하게 여겨지는 노동에서도 '마음=몸'의 관여로 질을 회복시킬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인간에게 주어진 지혜는 '마음=몸'을 원천으로 하며 결코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태도를 바람직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몸'을 중심에 둔 진정한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은 능동성과 창조성 그리고 무엇보다 놀이를 만들어낸다.

 

노동교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부활하는 것

한 개인으로서 인간은 하나의 직업에만 갇힐 정도로 하찮지 않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이 일찍이 인간다운 이상으로서 인식하던 일이나 활동, 관조 생활을 조금이나마 우리의 삶에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조건 노동을 찬양하는 노동교에서 벗어나 다시금 진정한 인간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금욕주의를 시발점으로 하여 천직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자 일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 과제로 좁혀졌고, 그것이 거꾸로 돈을 버는 일이 찬양받는 자본주의를 등장시킴으로써 어느새 천박한 욕망을 자극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이 괴물이 우리의 신이 되었다. 이에 봉사하는 일을 소명이라며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교의 정체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몸'에서 샘솟는 지혜가 유능한 관리자인 '머리'의 이성과 협력하여 사회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기존의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그 사람다운 발전을 반드시 이끌어낼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나면 비인간적인 노동이 점차 일이나 활동으로 바뀌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노동교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 중요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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