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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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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 -p.46-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p.121-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유에 대해 묻다

나치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저자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자유가 있으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이다. 어린아이의 발가락이 찢겨나가고 눈앞에서 시체가 나뒹굴어도 의미를 찾은 인간만이 유일하게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고 말한다. 나치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웠던 사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가치는 지옥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한 남자의 고백에 의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도대체 자유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처참한 지옥에서도 숨 쉴 수 있는 것일까?

 

자유란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p.181-

목숨을 저당잡힌 극한의 환경 속에 매일 죽음과 씨름하며 육체를 가혹하게 밀어붙인다. 영양결핍은 말할 것도 없고 낡고 해진 축축한 신발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습지보다 더 습한 신발 속에 자신의 맨발을 매일 새벽 밀어 넣는다. 신발끈은 사치다. 그나마 작업장 주위에 떨어진 철사가 있다면 다행이다. 영하의 혹독한 추위는 동상과 함께 발가락을 먹어치운다. 일어날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줌과 똥으로 범벅된 자신의 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도움도 거부한 채 무기력하게 이틀 동안 누워만 있는다. 그리고는 예외 없이 모두 숨을 거둔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성탄절이 지난 다음 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희망찬 모습으로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성탄절이 되면 이 고통으로부터 자신들이 해방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성탄절이 지나도 모든 것이 그대로다.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은 죽음으로 직진한다. 결국 수용소에서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죽음과 동의어다. 
그러나 저자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생존에 대한 책임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확신을 갖는다고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을 생각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강제 수용소에서도 내면의 자유와 영혼의 위대함을 약탈당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자유란 가치는 외부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치인가? 

당신은 나치인가? 부당하고 불쾌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인간의 존엄성 측면에서 타인을 대하고 있는가? 혹시 그저 타인을 유용성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아우슈비츠의 정문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다"

독일군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명분으로 인간을, 유대인을 노동하는 수단적 존재로 정의하였다.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낙인찍힌 유대인들은 얼굴에 핏기가 없거나, 약해보이거나, 병에 걸리면 가차 없이 방아쇠가 당겨졌다. 독일군 병사의 손끝에서 삶과 죽음이 간단하게 결정되었다. 휙휙. 왼쪽으로 분류되면 가스실이고, 오른쪽으로 분류되면 노동이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노동을 신성시함과 동시에 노동하는 인간에게 최고의 미덕과 가치를 부여했다. 성경의 한 구절인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는 문장을 볼때마다 인간을 유용성 측면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공포스럽다. 우리 사회는 인간 존엄성과 유용성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버린다. 오늘도 사람들은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밝은 미소와 경쾌한 인사를 건넨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좋은 것은 선한 것이다."라는 주문을 매일 같이 외우면서.

아우슈비츠 정문 입구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다"

 

나에게 묻고 답하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깨달음과 성찰의 경지로 이끄는 특이한 습성이 있다. 때문에 얼마큼 죽음을 느낄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를 속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오만함을 드러낸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 건강, 가족, 친구, 돈, 명예, 지위 등등.. 당장 내일부터 없어진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지만 우리는 결코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믿고 또 믿는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잊고 지낸 진실에 눈을 뜨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말할 수 있는 그런 대답 말이다.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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