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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나도 모르게 박수 치면서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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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자페아다.

나의 세계는 곧 나의 삶이다. 내가 인식하는 세계 너머를 상상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앎의 범위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간다. 인간은 과거에 쌓아올린 지식과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만 수렴하는 존재다. 작가 채사장의 말처럼 어떤 면에서 개인의 세계관은 스스로의 감옥이 된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매우 제한적인 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자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운명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세계를 제한하는 굴레를 향해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나와 이 세계는 무엇으로 관계하고 있는가?"하고 질문하는 능력이다. 주어진 대로 복사하는 삶이 아닌,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자주적인 인간상. 그럴 때 인간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무한히 펼쳐진 내면의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모든 선입견은 사라지고,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지혜의 영역으로 직행한다. 그 첫발을 내딛기 위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의 가치는 충분하다.


나도 모르게 박수 치면서 읽은 책

작가 채사장의 지대넓얕 세 번째 시리즈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그동안 나도 진리를 탐구하면서 걸어온 내 나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작가 채사장의 생각과 무척 가까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이번 채사장의 신간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껏 탐독했다. 이번 지대넓얕 세번째 시리즈는 138억 년 전 지구의 탄생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순간까지 일원론과 이원론의 관점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지대넓얕 세번째 시리즈로, 현재를 이해하고 진리를 탐구하는데 이만큼 친숙하게 대중적 언어로 풀어놓은 책은 지금껏 없었다!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우주와 지구의 탄생 시점부터 기원전 고대까지 동서양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궁극의 지혜가 담겨있다. 매 장이 끝날 때마다 박수 치면서 읽었다.


일원론과 이원론의 거대한 두 가지 핵심 사상

이 책의 가장 큰 뼈대는 일원론과 이원론의 거대한 두 가지 핵심 사상으로 비춰보는 역사적 통찰이다. 이 거대한 두 가지 핵심 사상은 모든 담론들의 출발점으로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곳까지 이어진다. 수천 년 동안 찬란한 인류가 꽃피워온 문화인 종교, 과학, 철학은 결국 일원론과 이원론의 기초적 토대 위에 세워졌다. 서양 문명의 큰 틀을 차지하는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근거하다. 이데아론은 현실과 현실 너머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반면, 고대 인도에서 아리아인에 의해 전파된 고대 경전 <리그 베다>는 <우파니샤드>를 거쳐 중국의 도교, 불교까지 일원론적 사상이 핵심이 된다. 일원론은 궁극적으로 나와 세계는 결국 하나라는 관점으로 이 세계는 객관적 실체가 존재하는 물 자체의 세계가 아닌, 인간 개인의 내면으로부터 비치는 의식 속 환영일 뿐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위대한 독일 철학자 칸트다. 칸트는 기존 서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시도한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일체유심조,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범아일여,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의 사상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데, 칸트는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이 세계가 사실은 인간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모든 현상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미지일 뿐이고,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을 관념론이라 부른다.

기독교 사상에도 존재했던 일원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나는 사실 처음 접하는 인물이었다. 14세기 중세 유럽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독일 기독교 신비주의를 대표한다고 한다. 에크하르트는 기독교에 속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원론적 사상으로 당시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교황청으로부터 고통받는다. 에크하르트는 말했다.

"많은 단순한 이가 신은 저기에 있고 자신들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신을 보아야 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과 나, 우리는 하나다. 인식을 통해 나는 신을 내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사랑을 통해 나는 신 안으로 들어선다." -p.540-

"만약 당신이 내 마음을 인식할 수 있다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고, 진리가 이를 스스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542-


결국 세계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닌, 내 속에 세계가 있다.

나의 결론은 작가 채사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동일하다. 세계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세계가 있다는 진실.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의 시점으로 세계를 대할 때 조금 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그 진실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빛나는 진실 속에는 아군과 적군, 빛과 어둠, 낮과 밤, 서양과 동양, 남자와 여자, 있음과 없음, 탄생과 죽음, 기쁨과 슬픔, 부자와 빈자, 높고 낮음, 흑과 백, 이곳과 저곳, 천국과 지옥 등 맞고 틀림의 문제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맞고 틀림의 문제로 판단할 수 있는 방정식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입법자로써 자기 내면의 세계와 마주하며 천천히,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과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일독을 권한다. 진정한 내면의 대자유를 위해.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감자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와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세계관은 감옥이다.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는 감옥 밖의 한 줌의 공간도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누구나 특정 세계관 안에서 탄생하고 성정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한다...-Page.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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