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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삶의 본질로 직행하는 사나이,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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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은 지 1주일이 지났건만, 작품 속 인물인 조르바에 대한 향기는 여전히 내 가슴에 열정적인 온기로 남아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멸의 태양처럼 조르바의 영향력은 여태껏 작품 속에서 만난 주인공 중의 주인공이다. 짧은 책력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견줄만한 인물을 꼽자면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나 <이방인>의 뫼르소가 문득 떠오른다.

소설 속 주옥같은 대사와 철학적 난제들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든다. 조르바는 책을 읽기 전 내 모습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금단의 영역으로 남겨버렸다. 이 작품을 접하기 전의 내 모습은 어디론가 휘발되어 날아가 버렸다. 조르바는 내 모습의 흔적들을 그 어떠한 사심 없이 철저히 말살시켜 버렸다. 책을 읽기 전 내 모습과 책을 읽고 난 뒤의 내 모습은 서로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계선이 뚜렷해졌다.
옮긴이 이윤기의 맛깔스러운 번역도 열정적인 조르바의 한 부분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는 것. 하느님과 악마는 하나이고,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는 것과 넷이 아니라는 조르바의 이야기는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 조르바

"그래, 알겠다. 조르바 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작품 속 조르바를 표현하는 문장이다.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인 것이다. "하느님, 회사의 이익, 그리고 과부가 조르바의 머릿속에서는 아무 모순도 없는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조르바는 세상 만물이 언제나 처음 보는 것인 마냥 놀라움으로 마주한다. 사면을 굴러가는 돌멩이를 보고 돌멩이가 생명력을 얻었다고 놀라워하며, 밤하늘의 별을 보고 이런 별을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주위의 모든 것이 조르바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그의 영혼은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분리되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하다. 

 

돌멩이를 보고 놀랄 줄 아는 사나이, 조르바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익숙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가족, 직장, 사회, 친구, 연인 등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익숙함의 강력한 후보자들이다. 익숙함에 잡아먹힌 채 우리는 삶의 소중한 것들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렇다면 익숙함이란 무엇인가? 익숙함이란 그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만일 존재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특성이라면 사면을 굴러가는 돌멩이를 보고 놀라고, 꽃을 보고 놀라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놀라는 인간은 그야말로 미친놈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익숙함이란 결국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관점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 원시인(조르바)는 익숙함으로 포장된 삶의 껍질을 간단히 깨버리고 삶의 본질 속으로 곧장 들어가 버리는 재주가 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기적'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 작품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강렬한 문장이다. 조르바 역시 끊임없이 기적을 보고 놀란다. "저게 무엇이오?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오!"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조르바를 고용한 고용주 `두목`은 현장감이 떨어지는 책벌레로 묘사된다. 붓다의 사상을 탐구하며 삶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자 한다. 조르바와 두목은 서로를 진정으로 생각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조르바에게 정신적으로 철저히 포위당한 두목은 깨달음의 끝자락에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최후의 인간 ㅡ 모든 믿음과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 ㅡ  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두목에게 있어 최후의 인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조르바인 것이다. 조르바 야말로 모든 것을 비우고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사나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금방 죽을 것처럼 산다는 조르바의 이야기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조르바는 모든 것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열성적으로 임한다. 먹고 마시고 자는 것부터 일하는 것은 물론 사랑하는 것까지 육체와 영혼을 죄다 끌어모아 몰입한다. 텍스트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동안 나 자신은 조르바를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얻고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떠한 것을 읽거나 경험하고 난 후 그것을 동경하면서 그것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나는 참으로 싫어한다. 이러한 말속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배경, 지위, 능력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처럼 살고 싶어 해야 하는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노라면,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 피어오른다. 물론 조르바는 배경이나 지위,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를 그로서 존재하게 하는 행동양식에 대한 깊은 찬사를 보낼 뿐이다.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이 작품은 타인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착각하며 인생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내줘버린 시대에 불멸의 속성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다.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려 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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