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사랑의 본질"

728x90

 

과잉 긍정의 폭력성을 테제로 큰 충격을 줬던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이어서 <에로스의 종말>은 사랑에 관한 짧지만 강렬한 책이다. 긍정성과 부정성을 큰 꼭지로 자유로운 사유의 쾌감을 보여준다. 1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분량은 자칫 독자로 하여금 가벼운 산책길로 안내하는듯하지만, 준비가 부족한 독자에겐 암벽등반의 기회를 제공한다.

사랑은 아토포스적 타자를 향한다.

저자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나와는 전혀 다른 무지의 영역에 속해있는 타자에 대한 전무후무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타자는 나와는 별개의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필연적으로 부정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러한 부정성을 이질성, 아토포스적 타자라고 통칭한다. 즉, 사랑이란 `같음`이 아니라 `다름` 속에 사랑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특성상 모든 것을 물질화하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시대에 아토포스적 부정성을 용인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동질성을 전제하는 자본주의와 부정성을 전제하는 에로스는 철저하게 서로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동일자의 지옥 속에 사랑은 없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초연결사회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디어 매체를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하여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이러한 정보의 범람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어느새 그것들과 동일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모든 것이 전시되고 소비가 가능해지는 상황은 이질성이 제거되며 결국에는 에로스를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동일화되며 긍정화 돼 버렸기 때문이다. 획일화가 미덕인 자본주의의 물결은 사랑을 포함한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부정성이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라면, 죽음이야말로 가장 완성된 형태의 에로스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죽음이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타자의 세계 속으로 온전히 나 자신을 던지는 행위는 자아의 죽음뿐 만 아니라 자아의 해방이다. 사랑 앞에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은 아마도 아토포스적 타자로 자신을 해방시킨 용기 있는 에로스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사랑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만 제한시켜서는 곤란하다.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청춘 남녀 사이 불같은 한때를 위한 해석용으로만 사용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타자에 대한 부정성은, 나의 생각 외부에 있는 세계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총체적 담론이기도 하다. 철학의 끝, 학문의 끝은 결국 사랑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앞에 타자, 그리고 부정성이라는 놈은 꽤 괜찮은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병철의 책을 읽는 것은 지적 쾌감과 더불어 읽는 독자로 하여금 품격 있는 생각을 만들어준다.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은 사랑을 꿈꾸는 현대인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일독을 권한다.

 

존 에버렛 밀레이 작 '오필리아'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Page.51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