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책갈피]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728x90

 

결정장애라는 말이 왜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에서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p.6-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호의와 권리에 대한 이 이른바 '명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p.27-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붙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p.32-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p.33-

이영우 전 경상북도 교육감은 교사 연수 자리에서 "여교사는 최고의 신붓감" "처녀 여자 고사들 값이 높다"는 발언을 했다....문제는 그가 서 있는 기울어진 세상에서 익숙한 생각이 상대방에게 모욕이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p.37-

사람은 수많은 다중적 지위의 복합체이다. -p.42-

분명한 건 그중 어떤 경계선을 따라 우리는 내부인에게 친절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고, 외부인에게는 매정하고 때로 잔인한 사람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p.53-

차별은 두 집단을 비교하는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그 이분법을 여러 차원에서 중첩시켜 입체적으로 보아야 차별의 현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p.58-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p.60-

잔혹성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엄청난 간극에서 온다고 했다. 고든 호드슨과 동료들이 연구에셔 밝히듯,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생각 자체가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놀려도 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반복된다. 우리가 누구를 밟고 웃고 있는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p.91-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p.133-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관점이 언제나 지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지위의 남용을 피하고 소수자에 대한 공정하고 적절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균형이 필요하다. -p.146-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잘못 알려진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헌법재판소가 삭제를 요청하면서 교과서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004년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 제출한 의견에서 헌법재판소는 "오늘날의 헌법체계에서는 준법이란 정당한 법, 정당한 법집행을 전제로 한다"라고 밝혔다. 왜 하필 헌법재판소가 이런 의견서를 제출했는지는 자명하다. 헌법재판소의 역할 자체가 법이 정당한지 여부를 심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헌법재판소가 많은 결정을 통해서 밝혔듯, 악법은 법이 아니다. -p.164-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하여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렇지 않은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규칙은 민주주의 원리에 반한다. 오늘날 헌법재판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다수에 의해 만들어진 부당한 법을 헌법상 기본권에 비추어 심판하고 폐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고 복종하는 태도는 민주주의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복종은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존 롤스는 저서 <정의론>에서 "사회가 동등한 사람들 간의 협동체제로 해석되는 경우에는, 심각한 부정의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시민은 단순히 통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다음 롤스의 말처럼 때때로 '시민 불복종'이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는 방도가 된다. -p.165-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p.171-

차별을 둘러싼 긴장들은 '내가 차별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는 강렬한 욕망 혹은 희망을 깔고 있다. 정말 결정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할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언,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방어하고 부인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 -p.189-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p.189-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단순히 이해관계의 경합에서 다수가 승리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집단 간의 합의가 아니라 인권과 정의의 원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동의는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기본원칙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 누군가를 차별해야 한다는 다수의 주장을 수용해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p.199-

그런데도 정부와 국회가 그 규율의 대상인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온 것인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아니라, 헌법의 원칙을 따라야 할 국가기관이 그 원칙을 지켜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차별에 동참할수록 책임으로부터 '안전'해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부정부패에 가담하면 자정이 불가능해지듯 더 많은 사람들이 차별에 동참함으로써 공동체를 잠식하고 있다. -p.200-

 

2020/01/26 - [책 속의 책] -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인종으로 놀리는 게 웃겨?" 흑인 분장은 개그가 될 수 있을까? 한 개그맨이 TV 코미디 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에서 흑인 분장으로 웃음을 유도했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피부를 검게 칠하고 입술을 크..

aboutthefree.tistory.com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