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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도대체 무엇이 이 소설을 이토록 유명하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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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마다 위대함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서로 다른 것일까? 100년 정도 시간이 흘러버린 이 소설을 읽고 개츠비가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왜? `위대한`것인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출판사의 다른 번역본으로 또 구매해서 한번 더 읽었다. 마음속으로 내심 번역의 오류를 탓하는 오만함이 있었지만, 그만큼 시중에 나와있는 다양한 번역본들이 나의 오만한 마음에 합리적 근거를 만들었다.

 

두 번 읽은 개츠비는 조금 달랐다. 


두 번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한번 읽은 후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몰랐다기보단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첫 번째로는 반드시 그 소설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을 등한시하면 소설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고전소설이란 로마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다니는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개츠비가 탄생한 시대에 왜 금주법이 입법됐는지 알아야 한다. 두 번째로는 단 한 번의 독서로는 소설이 주는 깊이감을 음미하기에는 개인이 가진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이다. 두 번 이상 읽게 된다면 좀 더 여유로운 자세로 임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주워 담을 수 있다. 놓쳤던 부분은 물론이거니와 특정한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더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소홀히 했던 두 가지.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는 것과 두 번의 정독을 통해 개츠비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전반적으로 이 소설을 지배하는 내용은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이다.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수단으로써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다. 여기서 개츠비의 위대한 면모가 살짝 드러나는데, 개츠비를 제외한 인물들은 돈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개츠비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희미한 등불처럼 꺼지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 미국사회는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다. 전쟁의 승리는 미국 사회의 많은 것들을 넘쳐흐르며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사람들은 흥청거리며 세속화되어갔지만, 다수가 벌이는 가치적 전환의 태풍 속에 개츠비만은 홀로 흔들림 없는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뚜렷한 개별성으로 사랑이라는 가치를 추구한다. 표면적으로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추구하는 개츠비의 모습이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을 타당하게 받쳐주는 것 같지만 요즘 시대뿐 만 아니라 100년 전이라 해도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개인이 위대함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살아서 움직이기에 납득하기 쉽지 않다.
진정 개츠비의 위대한 모습은 이렇다. 다수가 형성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특히 돈과 관련된 것)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무엇이든 간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향해 온몸으로 나아가는 뚜렷한 개별성이다. 다수와 구분되는 개별성은 곧 진정한 자유이기도 하며, 그가 보여준 사랑은 진정한 보수의 가치인 것이다.

 

사랑은 확인이 아니라 확신이다.


내가 보는 개츠비는 세속화된 여자를 몇 년 동안이나 멍청하게 사랑하는 바보 천지 사랑꾼이 허무함으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심각한 오해로 보이며 그저 다른 연애소설로 이해하고 끝내서는 곤란하다.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함을 기꺼이 감내하며 확인하지 않고 확신하며 나아가는 모습.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적극적으로 이끌며 다수와 개별화하는 모습. 개츠비에게는 그것은 사랑이었으며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진정한 보수적 가치인 것이다. 개별성의 확립과 진정한 보수적 가치의 교차점에 개츠비의 위대함이 숨어있다. 때문에 내가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사랑이야기이면서도 사랑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아마도 누군가는 자신에게 개별성을 부여하는 것과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소중히 하며 지키는 것 모두 죽을 때까지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진 않다.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절대다수가 그것에 있어 위대하지 않게 행동할 때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1920년대 미국 사회보다 더 세속적이며 자본의 논리가 훨씬 더 깊게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쉽지 않다. 차라리 소설처럼 장례식장에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는 모습이 차라리 순수할지 모른다. 요즘은 5만 원짜리 한 장 아는사람 통해서 전달하고 귀찮으면 가지도 않는다. 지켜야할 진정한 보수적 가치들이 5만원짜리 한장 전달하는 것으로 그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하고 그것이 옳은 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고약해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완전히 개별화된 삶, 그리고 진정한 보수적 가치들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차라리 그러한 생각이 오만불손함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는 방향성이다. 목표지점에 대한 안착이 아니라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문제이다. 그것을 사유하게 만드는 역할, 이 소설은 그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충분하다. 또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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