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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 "죽음을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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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과학이며 모든 과학을 초월하는 것임을 그대는 알아야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다. 영원히 살 사람도 없고, 또한 영원히 살기를 기대하거나 확신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죽는 법을 배울 만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세상에 너무도 적구나. 나는 그대에게 이 신비의 가르침을 주노라. 이 가르침은 그대 영혼의 행복에 큰 도움을 줄 것이고, 모든 아름다운 삶의 근본이 되리라.”       <오롤로기움 사피엔티아> 14세기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 있으리라. 그곳에 있는 것이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있으리라. 이곳에 있는 것과 그곳에 있는 것이 차이가 있다고 보는 자는 영원히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걸으리라. 참된 마음만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으니, 그곳은 이곳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곳이 이곳과 차이가 있다고 보는 자는 영원히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걸으리라.”        <카타 우파니샤드> 제4장

“죽음을 배우라, 그래야만 그대는 삶을 배울 것이다.”    <옮긴이의 말> 류시화



<티벳사자의 서>는 죽음과 그 사후세계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1,200년 전 티벳에서 파드마삼바바라는 유명한 탄트라의 대가에 의해 기록됐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경전은 세상 여러 곳에 숨겨졌다. <티벳사자의 서>는 그렇게 숨겨진 경전들 중 하나이다. 세상은 아직 이 위대한 경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했다. 때문에 훗날 세상이 이 경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동굴 속에 감춰졌다. 그리고 뛰어난 테르퇸의 한 명인 릭진 카르마 링파에 의해 발견되었다. 

진리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과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대자유에 이르는 길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류시화 시인이 서두에 밝혔듯이 죽음이란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징적인 죽음 속에는 나의 존재, 나의 생각, 나의 관념 모든 것을 포섭한다. 죽음의 부정성을 깨닫고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 진리의 빛을 볼 때 우리는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한 철저한 공의 세계이며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고 형태가 없는 창조됨이 없는 것, 즉 다르마카야(법신)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자만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남이 없는 대자유에 이른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경전 속에 담긴 사상과 믿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죽음과 환생의 경계에 바르도(Bardo)라는 신비적 체험을 내놓는다. 이 바르도라는 사후세계는 49일간 지속되는 데, 이때 사자는 여러 단계에 걸쳐 대자유의 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이 부족한 사자는 결국 낮은 단계로 떨어지다가 끝내 인간 세계로 다시 환생하고 만다. 이러한 끊임없는 굴레를 순환하는 것이 윤회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통해 니르바나(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 담고 있는 기본적인 틀이다.
위대한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도 이 경전에 푹 빠져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그의 해설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이 책에 여러 위대한 학자들의 해설이 실려있지만, 그중에서도 칼 융의 심리학적 해설은 이 책의 백미라 하겠다. 칼 융의 해설 속에 이 경전의 핵심이 여러 차례 드러나는데 그중에 하나를 뽑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이 내재해 있다. 그 신은 바로 창조의 힘이다. 이 힘을 통해서 영혼은 생각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생각들에 의해서 영혼들은 서로 차이를 갖게 된다. 결국 생각은 모든 존재를 결정하는 조건일 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인간의 영혼 속에 신이 내재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불교적 해석을 더 선호한다. 이러한 종교적 입장에 대한 시각 차이도 이 책의 여러 해설을 통해 드러난다. 칼 융이 이야기했듯이 “이 책을 관통하며 흐르는 논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대범한 자세이다.”로 압축된다. 더욱이 사후세계인 바르도 상태에 있는 사자들은 모두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것은 철저히 사자가 죽기 전 경험했던 체험과 믿음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모습으로 불교인이라면 부처의 모습으로 바르도를 경험한다. 모든 근원은 내 안에서 피고 지는 것이다. 나란 존재는 광활한 우주 속의 모래알 같은 작은 점이 아니라, 그러한 광활한 우주는 소우주라고 불리는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본질은 하나이며 같다. 그 본질은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무엇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무지가 스스로를 눈멀게 하고 망상이 깨달음을 잊게 한다. 그것 때문에 우주의 모든 현상을 특정 짓는 조건과 차이와 활동들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 대승불교의 개론서인 대승기신론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노자의 <도덕경> 1장 ‘도가도 비상도’에서 “도라고 이름 지어질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 무엇으로도 되어야 하는 것이 없는 세계와 맞닿아 있다. 노자의 도는  곧 다르마카야(법신)이자 니르바나의 경지이다. 절대적인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무한히 연속되는 시공을 초월한 근원적 경험이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아무리 강조해서 지나침이 없다. 존재에 대한 원초적 성찰이자 강력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티벳사자의 서>는 죽음에 대한 통찰을 양껏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

주변 사람 중에 누군가 이야기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라고 말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가 이야기한 죽음과 그리고 무엇 때문에 죽음이란 단어가 그를 매료시켰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어찌 됐든 <티벳사자의 서>는 2018년 한 해를 절도있는 사색의 경험으로 채워줬다. 훗날 내가 죽음에 관계된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된다면 이 책은 반드시 내 기억 속에서 떠오를 것이다. 이 책은 통찰과 믿음에 관한 깊은 사색의 결과물로 집약된 농밀한 작품으로 일독을 권한다. 모두 자신의 존재에 대한 테르퇸으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들 여러 세계들은 그대 자신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 가슴의 네 부분에서 나오며, 
가슴의 중심부를 합하면 모두 다섯 개의 방향이 된다.
그것들 모두는 그대 안에서 나와 그대를 비춘다.
신들 역시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세월 이전부터 그대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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