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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과 실재론의 입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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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단어의 난해함이다. 특히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된 논리학의 본고장인 서양 철학에서 시작된 관념론이나 실재론과 같은 개념은 비전공자가 철학을 접하기에 무척 어렵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단어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관념론이나 실재론같은 단어의 개념은 초등학생만 되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이 두 사상의 핵심적 메시지는 우리 삶을 밀도있게 채워주고 생각의 깊이를 한층 넓혀준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몰라도 상관없지만, 한번 이해하고 나면 세계를 해석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줄 것이다. 채사장의 최근작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편에서 발췌한 내용을 통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철학에서의 관념론과 실재론을 조망해보자. 

​그대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삶에 고통받지 않기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갈테니

 


관념론은 실재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실재론이 상식적인 만큼 관념론은 상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관념론을 처음 접하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불편해지기도 한다. 관념론이 대단하고 어려운 개념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자전거 타기와 유사하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아 답답하지만, 한번 적응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쉽게 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실재론의 입장

우선 실재론과 관념론을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실재론은 인식되는 외부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하게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입장을 말한다. 쉽게 말해 눈앞의 물질 세계가 허상이나 가상이 아니라 진짜 세계이고, 나라는 존재의 탄생이나 소멸과는 무관하게 그대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관념론의 입장

반면 관념론은 실재론과는 반대다. 인식되는 외부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하게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말한다. 쉽게 말해 눈앞의 물질 세계가 사실은 나의 내면 세계라고 이해하는 관점이다.

 

실재론과 관념론에 대한 합리적인 부연 설명

모든 대립되는 학문적 개념이나 관점은 각각 나름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실재론과 관념론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대부분 실재론자로 태어나서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다가 실재론자로 죽는다. 다만 삶을 실용과 안락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진실과 깊은 이해의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관념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관념론이 실제 세계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사실 모두 감각적인 것이다. 빛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감. 이 외에는 나에게 드러나는 세계란 없다. 나에게 드러나는 세계는 온전히 감각의 세계다. 그런데 문제는 감각이라는 것이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발생한 주관일 뿐, 진짜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보자.

눈앞에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있다. 나는 이 사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본다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우선 광원이 있어야 한다. 태양이나 형광등이나 촛불이나 빛이 나오는 근원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 광원에서 입자이자 파동인 광자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광자가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튕겨 나간다. 튕겨 나온 광자의 일부가 눈으로 들어오고 망막의 시각 세포를 자극한다. 시각 세포는 빛 에너지를 흡수한 뒤에 이를 전기적 신호로 바꾼다. 이 전기적 신호가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전달된다. 뇌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어떠한 감각기관도 없지만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시신경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받아들인다. 이 신호들은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뇌가 해석한 이미지가 나의 내면에 드러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느낀다. 눈앞에 잘 익은 빨간 사과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눈에서 시작되어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빨간색'과 관련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사이에는 그저 전기적 신호만이 있다. 빨간색이라는 것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빨간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신체 밖에 있는가? 아니면 내 안에 있는가?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후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의 눈앞에 다채로운 색깔들로 드러나는 외부 세계는 사실 나의 내면 세계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외부 세계의 실체가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혹은 모습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건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전부니 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동양에서는 문명 초기에 이미 이러한 생각이 시작되었고 오랜 시간 많은 이에 의해 심도 깊게 탐구되었다. 하지만 서양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로 이원론적 세계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이것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된 존재로 파악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외부 세계를 실재하는 세계로 받아들이게 했다. 외부 세계를 내면 세계의 반영으로 생각하는 입장은 근대 이전가지 등장하지 못했다. 그러다 17세기의 예비 단계를 거쳐 18세기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지하고 심도 있게 탐구되었다.

 

- 채사장의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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